TANAKA의 역사

귀금속을 "다각적"인 시점으로 말한다. 다나까귀금속의 오랜 역사,경험속에서 떠오른 귀금속의 의외의 사실이나 다나까귀금속과의 관계를 컬럼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HISTORY of TANAKA HOLDINGS vol.8

금의 역사 제3차 골드 붐

제3차 골드 붐의 주역은 100그램짜리 바였다

제3차 골드 붐의 주역은 100그램짜리 바였다

금 가격 1그램=3천엔 이하 하락으로 생긴 1981년 11월의 제2차 골드 붐은 2주일만에 진정되었지만, 금 가격은 그 후에도 계속 하락해 다음 해 3월에는 2,475엔까지 값이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8월에 멕시코 통화 폭락으로 발단한 국제적 금융 불안으로부터 금의 국제가격이 상승으로 전환되고, 그에 따라 일본 국내 가격도 3월의 바닥 시세에서 불과 반년 후인 1982년 9월9일에는 4,220엔으로 급등했습니다.
그러자 붐일 때에 금을 구입한 고객들이 이번에는 "팔 때"라고 해서 귀금속상에 쇄도해 제3차 골드 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붐일 때에도 당사 점포에 장사진을 이뤄 저녁 5시에 오신 고객의 귀가가 밤 9시 반이 지날 정도였습니다.
영국의 귀금속 메이커 존슨 매티사의 임원이었고, 당시 당사의 고문이었던 호지슨씨는 이 골드 붐을 보고는 "일본은 참 평화로운 나라다"라고 비꼬았던 것입니다. 해외에서의 금 가치 상승은 통화에 불안을 품었던 인물이 자산을 금으로 바꾼 것에서 일어난 것인데 일본인은 반대로 금을 팔고 있다니... 금 전문가인 그가 비꼬는 말을 한 것도 납득가는 것이었습니다.

금의 역사 지금형 금화의 상륙 그 세번째

"크루거란드 금화" 판매를 둘러싼 인터골드사와의 의견 차이는 스프레드 폭을 어떻게 설정하는가였습니다. 스프레드란 점포에서의 판매가와 구매가의 차이로 소매점은 이 폭이 넓을 수록 이득이 많이 생기므로 판매 의욕도 높아집니다.
당연히 당사는 소매점의 개척, 판매촉진의 필요성으로부터 스프레드폭을 넓히려고 했지만, 인터골드사는 이 폭을 줄이도록 요구. "이 금화는 푸쉬(판매) 전략으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풀(고객의 자유로운 구입)로 판매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해온 것입니다. 결국, 스프레드폭은 당사가 타협하는 형태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발매 초년도의 판매 목표는 금화 100만매(중량으로 하면 10만 온스, 약 310kg). 당사로서 파격적인 선전비 연간 10억엔을 투입한 보람이 있어서 1980년 12월의 발매 개시와 동시에 백화점이나 귀금속 소매점으로부터의 판매 신청이 쇄도. 판매량은 초년도 목표를 가볍게 돌파해서 중량 환산으로 목표의 2배 가까운 18만 온스에 달했던 것입니다.

귀금속의 잡학 귀금속의 접수(하)

출전: 월간 오키나와사 “도쿄점령”. 본 사진은 이미 공표된 것임.

출전: 월간 오키나와사 "도쿄점령". 본 사진은 이미 공표된 것임.

종전 직후, 일본 국내의 귀금속은 GHQ의 직접관리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GHQ가 접수한 것은 금 약 113톤, 은 2,416톤, 백금 4톤으로 일본 국내의 귀금속은 죄다 접수되어버렸습니다.
당시 GHQ는 일본부흥책으로 쌀과 석탄의 증산을 명령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학비료와 화학의 제조에 불가결한 백금이 필요해져 당사도 백금을 조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GHQ로부터의 백금 불하는 일본은행의 지폐로는 통용하지 않아 일본 국내 광산으로부터 구입한 금을 납부해 겨우 조달할 수 있었던 시대였습니다.
이윽고 1950년에 "귀금속 관리법"이 제정되어 GHQ의 정책이 원칙적으로 일본 정부로 이어졌습니다. 일본 정부가 국산금의 전량을 사들여 필요량을 할당하게 된 이외에 시중 거래도 허가제로 되었습니다. 1953년에는 법 전면 개정으로 "금 관리법"이 탄생. 할당된 일본 국산금의 일부를 자유판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금속 업계도 이윽고 "암흑의 시대"에서 빠져나와 조금이지만 밝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시대가 된 것입니다.